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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크&캠핑

할리 데이비슨 군용 모터싸이클

by 천년백랑 2014. 8.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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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 년, 미국은 멕시코의 판쵸 빌라 혁명과 정면으로 맞닥뜨렸다. 블랙잭 장군의 통치하에 있던 접경지의 몇몇 미국 군대는 미국-멕시코 국경을 따라 빌라와 그의 부하들을 쫓고, 추격해갔다.


 

 

교통이라든가 여러 의미 가운데 할리 데이비슨 오토바이는 사이드카에 머신건을 탑재하게 된다. 미육군성은 곧 할리 데이비슨사에 직접적으로 십여대의 모터싸이클을 주문했고 이로써 백년간의 파트너쉽이 시작되었다. 

 


 

작전에서 증명한 모터싸이클의 전략적 가치와 함께 미육군성은 1차세계대전과 함께 미국의 시작과 함께한 할리 데이비슨사를 무겁게 의존하게 되었다. 사실 초창기 미국인들은 휴전 서명이 있은 다음날부터 독일에 들어가기 위해 할리 데이비슨 모터싸이클을 탔다.

 


 

1차세계대전의 끝무렵, 1917년 초부터 전쟁 마지막날까지 생산된 할리 데이비슨 모터싸이클의 절반 가량이 미군으로 넘어갔다.

 


 

전시 생산은 밀워키의 주노 애비뉴에 군 수송 역학 병참학교의 탄생을 가져왔고, 수년 후 할리 데이비슨 대학으로 진화하게 된다. 전쟁 막바지에는, 약 2만대 가량의 할리 데이비슨 모터싸이클이 군에서 사용되었다.

더욱 놀라운 숫자는 할리 데이비슨이 9만대 이상의 WLA 모터싸이클을 생산했던 2차세계대전에 나왔다. 그 바이크의 1/3 가량이 러시아 군대에 팔렸고 나머지 대부분이 미군으로 갔다.

 


 

회사의 전시 생산은 미육군-해군으로부터 전시 생산 "E"상을 얻을 정도로 충분히 모범적이었다. 훨씬 적은 수량으로 생산된 다른 모델은 WLC(캐나다 군), XA, 사막전을 위한 shaftdrive 모터싸이클, UA 모델뿐만 아니라 잘 알려진 군용 G 모델 Servi-Car(삼륜) 등이 있었다. 

 

 

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평화시대와 함께 할리 데이비슨은 rarer XLA (military Sportster)와 다른 WLA 모델을 생산하고, 최근 몇 년 간은 MT-350 및 MT-500, 군 오토바이는 Rotax사와 협력하여 생산하게 되었다. 

 

 

포스트 2차세계대전 동안에는 걸프전을 위해 캐피탈 드라이브 앤 요크 공장에서 폭탄 케이스와 케이스 돌기를 생산했다. 1998 년 MT 모터싸이클의 단종과 함께 할리 데이비슨의 군용 오토바이 생산은 끝을 맺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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